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 영원히 열화되는 삶에 대하여
🔖 선이란 게 뭐지? 사람들이 뭐가 과하다고 하는지 파악하려고 내가 내 것을 들여다보면, 나는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이게 과하다고 생각하면, 사회는 또다른 입장이고. 그래서 이건 영원히 맞힐 수 없는 과녁과도 같다. 영원히 불통.
나는, 영원히 빗나가는 화살인겨.
🔖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